티스토리 뷰

걷는 날들

아픔과 비극적 삶

Dahl 2017. 5. 28. 10:54

두 달 째에 세 번째 월경을 시작했다. 배가 아려왔다. 자궁 벽에 산더미같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핏덩이들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픔이 납득이 되었다. 살이 되어있던 게 뜯겨 나가는 것이니까. 아픔이 납득이 되면 그냥 끄덕이고 말게 된다. 이를테면, 그래서 아픔이 조금 덜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가능한 아픔은 조금은 안도가 된다. 그래서 그 아픔은 조금은 견딜만한 게 된다. 문제는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는 아픔이다. 왜 아픈지 모르고 아픈 아픔은 그 아픔의 진짜 크기보다도 더 괴롭게 다가온다.

숨 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다만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힘든 일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숨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던 건, 아마도 이해할 수 없던 괴로움이 이해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니라 그 괴로움이, 그 괴로움이 내 안에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있다는 걸 이해 못하겠다고 하지 말아달라고.

아침에 엄마가 기독교 방송을 보고 있었다.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죽여달라고, 요나라는 선지자도 그렇게 빌었었다고.

요나? 요나는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사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별 생각 없이 간간히 귓속으로 파고드는 글자들을 가만 놔두고 있었는데,

주여 죽여주소서... 죽여주소서... 그런 말이 들려왔다. 요나라는 선지자도 그렇게 빌었었다고. 그 유명한 목사는 우스갯소리로 덥기만해도 죽여달라고 하는게 사람이라고 하면서, ... 그리고 뭐라고 했더라.

죽여달라고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아무렴, 요나도 그렇게 말했는데, 여러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 다 이해합니다, 하면서. 

 

하지만 죽으면 천국에 가지만, 삶이란 엄청난 즐거움입니다. 죽으면 영혼은 있지만 육체는 없어요. 그러니 육체를 빌려서 하는 모든 걸 다 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 삶이란 엄청나게 좋은 겁니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건지는 알겠다. 그 말엔 많은 것들이 간소화 되어 있고,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도 하고, 아무튼 가벼운 '접속사' 쯤으로 저런 설교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다음의 설교는 듣지 않았으니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겁니다. 여러분, 즐거움, 즐거움!! 뭐 이런 말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죽자고 달려들어서 아니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악이 육체를 빌려서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라든가 나는 그딴거 다 필요 없습니다, 라든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피곤하달까. 그래서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의 말에 반대합니다! 하는 게 아니고, 그 목사가 하고자 하는 말 역시 삶은 즐거운 것입니다, 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그 어떤 신실한 신도가

 

주여 죽여주소서... 죽여주소서...

 

라고 빌었던 그 순간, 그 느낌.

그건 뭐랄까, 포기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정말 단지 간절한 마음이 담긴 소망의 목소리로 들렸다.

얼마만큼의 믿음과 얼마만큼의 간절함이 있어야 그런 목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 나는 서글퍼졌다. 그 목소리에 마음이 동하면서, 하지만 나는 저렇게 빌지는 못하겠다. 저 사람처럼, 저런 목소리로는.

하지만 내가 받은 그 느낌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고 싶다.

 

삶은 그냥 계속 되고 그걸 코미디로 할지 비극으로 할지는 자기가 정하는 거야.

나는 삶을 코미디로 풀어내는 사람은 아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모든 걸 진지하게 받아들여 버려서 때론 유쾌하거나 가벼운 종류의 것도 잔뜩 물에 젖어 물컹해져버린 비누 조각처럼 맥빠지는 걸로 만들어버리는 쪽이다.
그래서 계속 되는 삶을 내가 코미디로 정하겠다고 해서, 그게 정말 그렇게 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굳게 마음 먹고, 열심히 웃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그러다간 다시 어느날 아침엔가 울고 있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저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가 정하는 거야'라고 하는 말이 이해가 된다. 물론, 타고난 기질이랄까, 그런 게 있어서 마냥 행복하고 천진하고 걱정 없고 모든 걸 희극으로 만들어 버릴 수는 없지만. 삶이 비극이라고 느끼는 중에서도 어느 정도 웃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 비극을 청천벽력 같이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매번 상처받는 것도 지겹다고 해야 하나. 익숙해진건지 무던해진건지, 그런 것 과는 또 다른 느낌인 것 같은데.

 

아프고 비극적인 삶을 그냥 살아간다. 그걸 그냥 납득하게 되었다. 납득하니, 견딜만 한 걸지도 모른다.

 

 

 

 

 

 

'걷는 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래성이 아닌 것들을 바라보며.  (0) 2018.06.17
뭐가 그래야  (0) 2017.05.29
나쁜 난쟁이  (0) 2017.05.27
껴안고 싶은 건지도  (0) 2017.05.27
우울한 망고젤리의 맛  (0) 2017.05.26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