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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에 마감이 끝나고 집에 갈때면 이따금 망고젤리 음료를 마셨다. 폐기일에 잔뜩 남은 젤리를 버리는 게 아까워서 망고젤리를 잔뜩 담은 음료를 마시곤 했던 것이다. 겨울이었고, 추위를 견뎌가며 버스를 기다리면서 두꺼운 빨대로 망고젤리를 먹었다.
가끔씩 그 망고젤리의 맛이 떠오른다. 이젠 단종되어서 먹을 수 없는 메뉴가 되었다.
그때는 일하면서 받는 스트레스와 학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주변인들과의 비교 속에서 스스로 내 자신에게 가혹한 소릴 퍼붓는 날들이었다. 우울감은 극에 달했고, 자주 울었고, 늘 무기력했다. 나는 그때 주로 무력감을 느꼈다.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원하는 바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가 의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환상, 헛된 희망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와중에도 내 삶을 스스로 이끌어 나가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어떻게든 그 무력의 구렁텅이, 삶이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어딘가로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 그 상황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쳤다. 나는 삶을 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지키기 쉬운 것들을 정해놓고 그걸 지킴으로써 스스로 어느 정도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삶의 주도권을 되찾은 듯한 느낌을 받으려고 말이다.
나는 여러 규칙을 정했다. 마음이 무너지니 생활습관이 무너지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기 때문에 주로 생활습관을 개선하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카페인 섭취량을 제한하고 음식의 종류를 제한했다. 취침시간과 기상시간, 취침 전에 해서는 안 되는 일들, 쉼호흡과 독서, 스트레칭 처럼 하면 좋은 일들... 이러한 것들에 수행해야 하는 임무들을 하나 둘 씩 더해 나갔다. 그러나 사실 그런 모든 것들을 다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어느샌가 모든 규칙을 무시하게 되었다. 나는 사는 데에 급급했다. 마음을 돌보지 않았다. 숨쉬는 기계처럼 감정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그 무렵 망고젤리 음료를 마시곤 했다. 처음에는 달콤하고 탱글하고 상큼한 망고젤리의 맛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자꾸만 먹고 싶은 맛이었다. 그러나 버스를 기다리면서 먹는 망고젤리의 맛은 어느덧 우울의 맛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너무도 익숙하고, 익숙한 그 맛이. 그것은 더이상 망고젤리의 맛이 아니라 내 습관과 내 생활, 내 삶의 맛이었다. 뱉어버리고 싶은 끔찍하게 슬프고 달콤한 맛.
그 다음부터는 버려야 하는 망고젤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걸 먹지 않았다. 그걸 먹으면 견딜 수 없을만큼 슬퍼졌기 때문이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었다. 나는 버스에 오르면서 전화를 걸어준 그녀에게 망고젤리 음료를 먹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곤 덧붙였다.
이걸 먹는 게 싫어. 이걸 먹으면 우울해 져. 우울한 맛이야. 이유는 모르겠어. 왠지 그런 걸.
그럼 이젠 먹지 마. 그녀가 말했다.
나는 내가 웬 멍청한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뭐라고 생각할까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망고젤리 음료는 단종되었고 나는 아르바이트를 관뒀다.
지금 그걸 다시 먹으면 어떤 기분일까. 다시 우울의 맛을 느끼게 될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사물에 깃든 감각이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이후에 내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당시엔 그걸 몰랐기 때문에 내가 왜 그러한 우울 속에 빠져 있던 것인지도 몰랐고, 다만 우울해 했을 뿐이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나는 스스로를 더욱 밀어붙였다. 생각으로 자학했다. 어쩌면 내 삶의 주도권을 앗아간 것도, 나를 끊임없이 어딘가로 끌고 가던 그 힘도, 다 나 자신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망고젤리의 맛을 우울의 맛으로 만들어 버린 것도.
하지만 또 내 탓을 하고 싶진 않다. 마음이 무너진 것이, 다 그게 마음 탓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더이상은 마음이 나를 몰아 붙이는 것에 일조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도 강력해서 정말이지 속수무책으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힘이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그걸 연습하는 시기에 있는 것 같다. 마음이 요동치고, 나는 그걸 통제하려고 노력한다. 생각이 아무렇게나 흘러가 버려서, 결국 그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른 채 단지 나를 아프게 하기만 할 뿐인 것으로 발전하는 걸 막기 위해서 생각의 흐름을 끊으려고도 노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해야 하는 모든 것은 어렵다. 쉬운 노력이란 없다. 적어도 내게는. 그래서 쉽게 포기하고 마구잡이로 망가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영문도 모른채 우울한 망고젤리 맛 같은 것이 생겨나버린 겨울도 있었지만, 요즘은 행복의 맛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궁리를 하기도 한다. 여전히 모든 게 어렵고 두렵고 불안하지만. 언젠가 망고젤리를 다시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때가 올 거라는, 그런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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